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한 스포츠 관계자는 고(故) 최숙현 선수 사망 사건과 관련해 이같이 넋두리를 했다. 최 선수 사건은 결국 군사독재정권 시절 ‘체력은 국력이다’라는 구호를 내걸고 엘리트 체육에 모든 것을 쏟아부은 데 따른 산물이라고 말했다.
틀린 말이 아니다. 한국 체육은 뿌리부터 폭력이라는 거름을 먹고 자랐다. 스포츠의 기원으로 불리는 고대 그리스 올림픽이 폭력성 가득한 전쟁과 밀접한 관계를 맺고 있는 것을 비롯해 스포츠가 근본부터 폭력성과 뗄 수 없다는 것과는 또 다른 지적이다. 올림픽에서 금메달을 딴 선수는 ‘국민적 영웅’으로 추앙을 받고 평생 연금, 병역 혜택을 받는 등 성적만 좋으면 특권을 누릴 수 있는 성적지상주의가 스포츠 현장의 폭력을 용인하게 만들었다는 것이다.
한국 스포츠의 뿌리깊은 폭력
고교 시절부터 트라이애슬론 청소년대표와 국가대표를 지낼 정도로 유망주였던 최 선수는 지난달 26일 새벽 부산의 숙소에서 극단적인 선택을 했다. 최 선수는 세상을 떠나기 전 엄마에게 휴대폰 메시지를 통해 마지막으로 ‘엄마 사랑해’, ‘그 사람들 죄를 밝혀줘’라고 전한 것으로 알려졌다.
이번 사건을 세상에 알린 봅슬레이·스켈레톤 국가대표 감독 출신의 이용 미래통합당 의원은 “누구 하나 나서서 바로잡지 않고 쉬쉬했으며 온갖 방법을 동원한 회유 시도에 23세의 어린 선수가 느꼈을 심리적 압박과 부담은 미루어 짐작해 보아도 엄청났을 것”이라며 “‘아무도 내 얘기를 들어주지 않는다’, ‘세상 어디에도 내 편은 없다’는 좌절감은 결국 그녀를 극단적 선택에 이르게 만들었다. 고인에게 폭언과 폭행을 일삼은 자들이 있다면 반드시 책임을 져야 한다”고 주장했다.
성적이 모든 것을 해결해주는 한국 스포츠 문화는 지금 심각한 후유증을 겪고 있다. ‘좋은 성과를 내기 위해선 맞으면서 훈련하는 게 당연하다’는 문화는 이미 뿌리가 깊다. “한국 사회의 위계질서 문화가 스포츠 특유의 폐쇄성과 만나면서 ‘괴물’을 낳고 말았다”는 말도 괜한 소리가 아니다.
국가인권위원회 스포츠특별조사단이 지난해 11월 발표한 실태 조사에 따르면 신체폭력을 경험한 초·중·고교 학생 선수 가운데 ‘자기가 잘못해 피해를 당했다’고 답한 비율이 21.4%나 됐다. 이른바 ‘피해의 자기내면화’다. 이는 피해자의 소극적인 대처로 이어지는 것은 물론 폭력의 악순환·대물림으로 연결되는 원인이 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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한 중학생 여자 펜싱 선수는 인권위와 인터뷰에서 “자기가 원하고 꿈이 있는데 스스로 해낼 수 없다는 생각이 들면 누가 옆에서 그렇게(폭력) 하는 것도 나쁘지 않다고 생각한다”고 말해 충격을 던졌다. “선배들도 이렇게 했으니 저희도 이제 자연스럽게 되더라. 운동하는 사람들은 쳐 맞아야지 정신을 차린다”는 중학생 남자 양궁 선수의 말은 폭력의 악순환이 얼마나 심각한지를 보여준다.
박선영 한국여성정책연구원 선임연구위원은 “스포츠분야 성폭력·폭력 사건은 선수와 지도 간의 위계적인 구조, 체육 권력 등이 결합해 일상성, 지속성, 폭력성 등을 가지고 있다는 특징이 있다”며 “메달 중심주의, 엘리트 스포츠 정책 등으로 말미암아 폭력·성폭력 사건은 은폐될 뿐 아니라 침묵이 강요되기도 한다”고 설명했다.
한국 스포츠의 폭력이 더욱 심각한 이유는 사건의 대부분이 학교에서 일어나고 피해자가 미성년자이기 때문이다. 1997년부터 2019년 9월까지 스포츠 폭력과 관련한 127건의 판례 가운데 성폭력 사건은 71건이었다. 이 중 학교에서 벌어진 사건이 절반이 넘는 38건이나 됐다. 스포츠 분야 폭력·성폭력 사건에서 거의 대부분 가해자는 ‘교육자’인 성인이었고 피해자는 미성년자인 학생이었다.
박선영 위원은 “스포츠분야에서 발생하는 폭력·성폭력 사건은 가해자 개인의 일탈적 행위를 엄벌하는 것에 그쳐서는 안 된다”며 “폭력·성폭력 사건이 발생하고 은폐되는 구조를 변화시켜야 한다”고 강조했다. 이어 “스포츠 국가주의, 체육 권력, 메달 중심주의, 엘리트 스포츠 정책 등 성폭력의 발생과 은폐, 침묵을 강요하는 구조의 해체가 이뤄져야 한다”고 덧붙였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