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기자수첩]원래 그런 것은 없다

  • 등록 2018-02-26 오전 6:00:00

    수정 2018-02-26 오전 6:00:00

[이데일리 스타in 김윤지 기자] 한 중견 배우에게 성추행을 당했다는 A씨를 우연히 만났다. 몇 년 전까지 연극 무대를 밟았던 A씨는 한 중견배우의 작품에 출연할 뻔했다. 큰 배역은 아니었지만 오디션 끝에 따낸 소중한 기회였다. 몇 차례 인사를 나누며 안면을 튼 중견 배우는 어느 날 A씨를 불러냈다. “마음이 가는 후배”라며 “연기를 가르쳐 주겠다”는 이유였다. 혼자 오란 말도 덧붙였다. 석연찮은 느낌이었지만 하늘같은 선배의 제안을 거절할 수 없었다. 늦은 밤 중견 배우의 사무실로 찾아갔다. 아무도 없는 그곳에서 중견 배우는 “멜로 연기를 가르쳐 주겠다”며 다짜고짜 얼굴을 들이댔다. 격렬히 저항 끝에 A씨는 간신히 그곳을 빠져나왔다.

A씨는 결국 작품을 포기했다. 사과는 듣지 못했다. 주변에 도움을 청했지만 “원래 그런 사람”이란 말만 들었다. 목격자도 증거도 없어 법적인 처벌도 쉽지 않아 보였다. A씨가 맡기로 한 배역은 다른 배우에게 돌아갔다. 이후 갑작스럽게 2~3편의 작품에 출연해 달라는 제안을 받았다. A씨에겐 의아한 일이기에 깜짝 놀랐다. 알고보니 배후엔 그 중견 배우가 있었다. A씨로선 분통 터지는 일이었다. 제안은 모두 거절했다. 지금이라도 중견 배우의 잘못을 알리고 사과를 받자는 기자의 말에 A씨는 “이제 와서 무엇이 달라지느냐”고 되물었다. A씨는 이제 연기를 하지 않는다.

“옛날부터 말이 많았다.” 연예계 성추문을 취재하며 가장 많이 들은 말이다. 이윤택 연출가, 조민기, 조재현은 다년간에 걸쳐 반복적으로 성추행했다는 의혹을 받고 있다. 공통점은 “연극계의 왕” “캠퍼스의 왕” 등 한 분야의 권력 정점에 있는 인물이란 것이다. A씨에게 몹쓸 짓을 한 중견배우도 크게 다르지 않다. 피해자들은 하나 같이 단원이나 제자, 후배, 직원 등 상대적 약자다. 그들의 부당한 행위를 선뜻 고할 수 없는 위치에 있다. 주변인들이 알면서도 침묵했던 이유다.

이번 사태에 대해 물으면 업계 관계자들은 오랜 전부터 알았다는 듯 고개부터 내젓는다. 그때 짓는 씁쓸한 표정에 물음표가 생긴다. 그렇게 수 명의 피해자가 생기는 동안 무엇을 했는지. 미 퍼스트(me first)라고 한다. 성범죄 현장을 목격하거나 피해자의 고통을 알면 자신부터 적극 나서자는 취지다. A씨의 이야기에 기자도 지난 시간을 돌아봤다. “나만 아니면 된다”는 이기심에, 혹은 끄집어냈을 때 불편함이 무서워 눈을 감진 않았는지.

“원래 그런 건 없다고, 바로잡자고, 누구 한 명이라도 적극 나서줬으면 아마 달라졌을지 모르죠.” A씨의 마지막 말이 계속 마음에 남는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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