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골프人]최호성의 인생 드라마 “8자를 좋아한다. 골프도 팔자였나 보다”

최호성의 골프 인생 스토리...가나한 농부 아들, 고교 시절 엄지 손가락 절단, 독학 골프...그럼에도 골프입문 1년3개월 만에 프로 골퍼,  
  • 등록 2017-08-17 오전 7:30:03

    수정 2017-08-17 오전 7:30:03

최호성은 경북 포항의 가난한 농부 아들로 태어났다. 고등학교 3학년 때는 오른손 엄지 손가락이 절단되는 사고를 겪었다. 그는 그러나 역경을 딛고 프로 골퍼가 됐다. 그의 인생은 한 편의 드라마다.  사진=KPGA 민수용 제공 

[이데일리 골프in 김세영 기자]최호성(44)의 인생은 잡초다. 고등학교 시절 오른손 엄지 한 마디가 절단되는 사고를 당했다. 충격이 컸다. 한동안 방황했다. 그러다 골프장에서 아르바이트를 하게 됐다. 그곳에서 운 좋게 골프를 익힐 기회를 얻었다. 손가락 장애에도 불구하고 골프 잡지를 보며 홀로 스윙을 만들었다. 그리고 불과 1년3개월 뒤, 그는 세미프로 자격을 취득했다. 스물여섯 때의 일이다.

남들보다 늦은 나이에 골프에 입문한 그는 골프채를 잡은 지 꼭 10년 만인 2008년 데뷔 첫 우승을 거뒀다. 그 후 국내 1승과 해외 1승을 더 보탰다. 나이 마흔에는 일본으로 눈을 돌렸다. 현재 그는 일본에서 활약하고 있는 한국 선수 중 최고참이다.

최호성은 “바닷가 촌놈으로 태어났고, 손가락 장애도 있으니 골프와는 태생적으로 상관없는 인생이었다”고 했다. 그는 그러나 우연히 접한 골프를 업(業)으로 삼고 있다. 그는 “골프를 할 운명이나 팔자였나 보다”고 했다. 일본 투어가 잠시 쉬는 사이 국내에 돌아온 그를 최근 서울 강남의 한 카페에서 만났다.

- 어떻게 지내고 있나.

“그냥 열심히 산다.”

- 한동안 긴 머리였는데 지금은 말쑥하다.

“2010년부터 2014년 말까지 한 4년 길렀는데 당시에 머리 자를 돈이 없어서 그랬나 보다. 하하. 일부러 머리를 기른 게 아니라 어떻게 하다 보니 그렇게 됐다. 머리를 기르는 동안 공도 잘 맞고 해서 그냥 계속 길렀다. 주위에서도 어울린다고 말하고…. 근데 빗질을 할 때마다 머리카락이 빠지고, 엉키고… 관리가 힘들더라.”

- 손가락 얘기를 안 할 수 없는데.

“수산고를 다녔는데 고3 7월에 실습을 나갔다. 참치 하역하고 해체하는 작업이었다. 그날따라 운이 안 따랐는지 장갑이 냉동 참치에 달라붙어 안 떨어지는 바람에 전기 톱날에 잘렸다. 그렇게 손가락 잘린 분들이 많다. 나는 한 개 잘렸지만 어떤 분들은 두 개 이상 잘린 분들도 많다. 눈 깜짝할 사이에 그렇게 된다.”

- 어린 나이라 정신적으로도 힘들었을 텐데.

“다시 돌이켜 보면 내가 다치고 싶어서 다친 것도 아닌데 정말 힘들었다. 솔직히 나는 기왕 군대를 갈 바에는 UDT나 특수부대 이런 데 가고 싶었다. 그런데 신체검사 받으러 가니까 면제라고 하더라. 방위라도 보내달라고 했더니 귀찮다는 듯 ‘다음’하면서 ‘빨리 가라’고 하더라. 군대 면제되고, 골프를 하기 전까지 방황을 많이 했다. 직업도 여러 차례 바꿨다. 그때는 술, 담배도 많이 했고….”

- 프로 골퍼가 되기 전 어떤 일을 했었나.

“노가다(막노동)도 했고, 집이 포항이라 포스코에서도 일했다. 그곳 하청업체에서 베어링도 갈고, 그리스 칠하는 일 등을 했다. 강원도의 돌 캐는 광산에도 있었고, 백화점 아르바이트, 슈퍼마켓 배달, 자판기 청소, 그리고 마지막에 골프를 하게 됐다.”

- 손가락 장애를 가지고 어떻게 프로 골퍼에 도전했나.

“골프를 할 운명이나 팔자였나 보다. 촌놈이다 보니 골프가 사실 어떤 건지도 몰랐다. 그때는 워낙 먹고 살기 바쁠 때였다. 우연찮게 골프장 아르바이트를 갔다가 열심히 하다 보니 계약직으로 올라갔고, 또 열심히 하다 보니 골프를 익힐 기회가 생겼다. 골프장 사장님이 제대로 된 서비스를 하려면 모든 직원들이 골프를 알아야 한다고 해서 근무 시간 외에는 골프를 할 수 있게끔 환경을 만들어주셨다. 기회다고 생각했다. 내가 거기에서 천년만년 일할 것도 아니었고, 내가 언제 골프를 배우겠나. 기회가 왔을 때 배우자고 한 게 이렇게 됐다.”

- 골프 입문 후 1년여 만에 프로가 됐는데.

“정확히는 1년 3개월 만에 세미프로 자격을 땄다. 1998년 1월8일에 골프를 시작해서 1999년 4월에 합격했다. 그해 2부 투어인 ‘016투어’가 5월부터 시작했다. 나는 7월부터 대회에 나갔다.”

최호성은 경북 포항 출신이다. 고향집 30m 앞이 바다다. 아버지는 농사와 바다 일을 겸했고, 어머니는 해녀였다. 그 역시 가끔 배를 타며 집안일을 거들었다. 어린 시절에는 바다와 살았다. 밋밋한 파도는 재미없어 태풍이 부는 날 거친 파도 속에서 수영을 즐겼다. 그러다 소용돌이에 휘말려 몇 차례 죽을 고비도 있었다. 어린 시절부터 거친 파도를 헤치고 뱃일을 했기에 최호성은 힘과 균형 감각이 뛰어났다. 그래서 남들보다 늦었지만 빠르게 프로가 됐는지 모른다.

- 클럽 잡은 날짜를 어떻게 기억하나.

“8이라는 숫자를 좋아한다. 다른 숫자와 달리 8은 무한대로 돈다. 그 느낌이 좋았다. 웨지에도 그래서 숫자 8을 8개 새겨 넣었다. 나에게 8은 ‘럭키 넘버’다.”

사주팔자(四柱八字)는 한 사람을 하나의 집으로 비유한다. 난 해(年), 달(月), 날(日), 시(時)를 그 집의 ‘네 개의 기둥’으로 본다. 각각의 간지 두 글자씩 총 여덟 글자(八字)로 표현한다. 그의 표현대로 ‘촌놈’에 ‘장애’를 가진 최호성이 골프를 하게 된 건 어찌 보면 타고난 운명, 팔자였는지 모른다. 그는 유독 8과 인연도 깊다. 1998년 1월8일에 골프채를 처음 잡았고, 2008년에 첫 우승, 최다 연속 버디 8개, 그리고 평생의 반려자인 아내는 그보다 여덟 살 어리다.

최호성의 캐디는 장인이다. 그의 장인은 벌써 10년째 사위의 캐디백을 메고 있다.  사진=KPGA 민수용 제공 

- 최호성하면 또 떠오르는 게 캐디를 맡고 있는 장인어른이다.

“처음에는 금강산에서 열린 아난티 NH농협 오픈이 계기가 됐다. 집사람 할아버님 고향이 평안남도다. 아난티 대회를 앞두고 내가 아버님에게 ‘이번 기회에 북한에 한 번 다녀오시죠’라고 했더니 아버님도 ‘좋지’라고 하더라. 그렇게 시작한 게 벌써 10년 됐다.”

- 캐디피는 확실히 챙겨 드리나.

“아버님께서 오히려 지원을 많이 해 준다. 내가 도움을 받는 편이다.”

- 그동안 서로 싸운 적은 없나.

“아버님께서 워낙 좋은 말씀을 많이 해 주신다. 하지만 경기 중에는 별 말씀을 안 하신다. 내 생각에 좋은 캐디는 선수 스타일에 맞게끔 해주는 캐디다. 시합 중에 감 놔라 배 놔라 하면 안 된다. 1년 365일 중 절반은 와이프와, 나머지 절반은 아버님과 생활하는 셈이다.”

- 지금까지 본인이 느꼈을 때 프로 골퍼의 삶은 어떤가. 

“일반인들이 골프 선수를 봤을 때는 화려하고 돈을 잘 번다고 생각한다. 하지만 선수들은 아니다. 대회장에 가면 수많은 선수들과 경합을 펼쳐서 상금을 벌어야 한다. 하지만 비용 들여서 대회에 나갔는데 매번 컷을 당하면 그 비용이 감당이 안 된다. 일본에 있으면 한 주당 기본 400만 원 정도 들어간다. 그런데 계속 컷이 되면 어떻겠나. 그 스트레스도 만만치 않다. 그건 겪어보지 않으면 모른다.”

- 올해 현재 시즌 상금이 250만 엔 정도다. 올해는 마이너스 아닌가.

“상금으로 봐서는 마이너스다. 남은 대회 잘 해야 시드도 확보할 수 있다. 그래도 데이터를 보면 시즌 초반에는 항상 그럭저럭하다가 가을이 되면 잘 했다. 그게 마음의 위안이다.”

- 가을에 성적이 좋은 이유가 있나.

“잘 모르겠지만 첫 우승도 가을에 했다. 아무튼 가을과 인연이 있는 것 같다. 가장이다 보니 가을이 되면 빨리 돈을 벌어야 한다는 중압감이 긍정적으로 작용한다. 그런 점 덕에 집중이 잘 되는 건지도 모르겠다. 근데 자꾸 나이는 먹고 쉽지는 않다.”

- 2012년에 일본 큐스쿨에 도전했다. 당시 한국 나이로 40세였는데.

“아마 그렇게 늦은 나이에 일본에 진출한 것도 내가 처음인 것 같다.”

- 어떤 계기가 있었나.

“뭐, 생활이라고 봐야지 않을까 싶다. 직업이 골프다. 골프 선수는 대회장에 있어야 하는데 국내 대회는 많지 않았다. 처자식은 먹여 살려야겠고, 할 줄 아는 건 골프밖에 없지 않나. 대회가 없으면 백수다. 생계를 위해서는 모험을 할 수밖에 없었다. 나 같은 경우 스폰서 있는 것도 아니고 큐스쿨 치르는 데 2000만 원 정도 들어가니까 모험이었다.”

- 일본 투어 5년 차다. 그동안 성적에 만족하나.

“만족한다. 사람은 만족을 하고 살아야 행복하다.”

"만족해야 행복하다'는 최호성은 자녀 교육에 대해 "스스로 헤쳐 나가도록 하는 게 부모가 해줄 수 있는 최선의 방법"이라고 말한다. 골프를 떠나 깊은 울림을 주는 철학이다.  사진=KPGA 민수용 제공 



- 사십대 중반이다. 현역으로 언제까지 뛸 수 있을 것 같나.

“딱 선을 그어 단정할 수는 없다. 지금도 내 코가 석자라 그런 생각 안 해 봤다. 매사에 그냥 최선을 다 해야 한다. 미리 걱정하면 스트레스다. 그래서 그런 건 생각하지 않는다.”

- 남들처럼 좀 더 일찍 골프를 했으면 지금보다 나았을 거라는 생각은 안 해봤나.

“가끔씩 한다. 어린 선수들을 볼 때마다 그런다. 골프라는 스포츠는 나이 어릴 때 시작하는 게 맞다. 어렸을 때는 몸이 유연하지 않나. 그 때는 근육을 늘리는 게 무한대다. 백스윙이 머리 뒤까지 넘어갈 정도로 유연성이 있다. 골프는 유연성, 순발력, 그리고 타이밍이 중요하다. 이 3박자가 맞아야 파워를 낼 수 있다. 근데 나는 사회생활하면서 시작했다. 근육이 굳어 있었다. 그러니 한계가 있고, 아무리 해도 안 되더라. 내 유연성의 한계는 여기까지라는 걸 느꼈다.”

- 골프를 안 했다면 지금 뭘 하고 있을 것 같나.

“나도 모르겠다. 사람마다 계획이 있지만 그 계획대로 가는 것도 아니지 않나. 그냥 지금까지 살아오면서 그 순간 최선을 다 하자 그런 마음으로 했다. 골프도 ‘내 인생에서 언제 골프채 잡아보겠나’라는 마음으로 했다.”

최호성에게는 아들 둘이 있다. 초등학교 4학년과 5학년이다. “아이들에게도 골프를 가르치고 있느냐”고 물었다. 그는 “아니다”고 했다.

“아이들이 골프를 좋아하고 거기에 미친다면 모를까 골프를 시킬 마음이 없다. 내가 해봤으니 얼마나 힘들지 알지 않나. 그냥 몸과 마음 모두 건강하게 자라줬으면 한다. 아이들이 스스로 삶의 방향을 정했으면 한다. 내가 그랬듯 아이들도 스스로 자기 상황을 극복하면서 인생을 헤쳐 나갔으면 하는 거다. 그게 부모로서 해줄 수 있는 최고의 방법 아닌가.”

그의 아이들은 어떤 팔자를 타고 나서, 또 어떤 인생을 살아갈까. 인터뷰 후 문득 든 생각이다. ‘아이들이 스스로 헤쳐 나가도록 해야 한다’는 그의 마지막 말이 깊은 여운과 깨우침을 주는 건 나만의 경우는 아닐 게다. 골프를 떠나 인생에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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