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암살' 역사 키워드 ③ 의열단 "친일파 처단, 그리고 싶었다"

  • 등록 2015-08-01 오전 8:00:00

    수정 2015-08-01 오전 10:54:02

의열단의 활동을 묘사한 당시 기사.(사진=민족문화대백과)
[이데일리 스타in 고규대 기자] ‘암살’ 역사 키워드 ③ 의열단 “친일파 처단, 그리고 싶었다”

영화 ‘암살’(감독 최동훈·제작 케이퍼필름)은 영화적 완성도뿐 아니라 역사적 인물과 사건에 대한 가치 부여로 또 다른 감동을 낳았다.

31일 오전 기준 502만5037명의 관객을 극장으로 불러들여 1000만 관객 고지를 향해 순항 중이다. 1930년대 강제병탄의 치욕에 빠졌던 영화 속 당시 역사는 미·일·중 3국의 치열한 외교 전쟁이 벌어지는 현재 우리에게 교훈을 준다. 영화 ‘암살’이 요즘 관객에게 던지는 메시지가 준엄하게 다가오는 이유다. ‘암살’ 속 곳곳에 숨어 있는 신흥무관학교, 간도참변, 의열단, 지청천부대, 김원봉, 김구, 데라우치 등 키워드로 알아본다.

③ 의열단

1920년대에 일본 고관(高官) 암살과 관공서 폭파 등의 활발한 활동을 하였다. 1920년대 말부터는 급진적 민족주의 성향을 띠었다. 1919년 3·1운동 뒤, 독립운동의 근거지를 해외로 옮긴 독립운동가들 중에는 독립을 쟁취하기 위해서는 일제의 무력에 대항하여 더 조직적이고 강력한 독립운동단체가 필요하다고 생각하였다. 이런 필요에 따라 1919년 11월 9일 밤, 만주 지린성에서 독립지사들은 민족주의 노선(路線)을 지향하는 항일비밀결사인 의열단을 조직하였다. 이 이름은 ‘정의(正義)의 사(事)를 맹렬(猛烈)히 실행한다’고 한데서 유래한다.(출처 두산백과)

의열단은 아나키스트 성격을 띤 무장독립운동단체였다. 의열단은 비폭력투쟁이었던 3·1운동의 실패가 일본의 폭력으로 인한 것이라 판단하여 ‘암살’을 해방을 위한 정의로 삼았다. ‘암살’에서는 의열단의 단장이었던 약산 ‘김원봉’(조승우 분)이 등장해 암살 작전에 대한 그들의 투지를 엿볼 수 있다.

최동훈 감독 曰,

“일제 강점기에 의열단은 친일파나 일본 관료들을 암살했다. 단재 신채호선생이 쓰신 의열단 창단 선언문은 힘찬 어조와 기개가 빛나는 명문으로서 깡패일본에 무장투쟁으로 항거함이 정당하다는 내용을 담고있다. 김구와 김원봉이 힘을 합친 건 역사에선 1939 이후의 일이다. 그 역사적인 배경을 놓고 허구의 인물들이 그 시대에 있었을 법한 일을 만들어가는 과정을 그렸다. ‘암살’의 배경이 1933년이니 더 앞당겨 만들어낸 이야기다. 당시 일제가 김원봉에 내건 현상금이 100원이다. 김구가 60원이었고, 그때 일본의 만주철도회사가 세운 조선호텔 건설비용이 120원이 들었다고 한다. 그랬던 사람들이 함께 힘을 합쳐 친일파를 처단하는 이야기를 보여주고 싶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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