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BIFF]이장호 감독 "돈만 버는 영화 안돼…작가정신 찾길"

  • 등록 2018-10-09 오전 9:26:55

    수정 2018-10-09 오전 9:26:55

멜빵 청바지에 청모자를 매치한 이장호 감독이 취재진을 향해 환하게 웃고 있다. 그는 “평소 멜빵바지를 즐겨 입는데 부산국제영화제를 위해 이태원에서 새롭게 장만했다”며 맵시를 뽐냈다. 일흔이 넘은 나이에도 그의 작품 행보는 진행형이다. 2013년 ‘시선’에 이어 신성일과 함께 새 영화를 준비 중이다.(글·사진=박미애 기자)
[부산=이데일리 스타in 박미애 기자]“내 영화인생은 NG다.”

이장호 감독이 지난 40여년 영화인생은 돌아보며 한 말이다. 한국영화사의 대들보나 다름없는 그의 입에서 나온 뜻밖의 표현에 웃음이 났다. ‘벼는 익을수록 고개를 숙인다’고, “NG 인생으로 얻은 소득이 감사와 은혜”라는 유머에 겸손을 얹은 말에서 노장의 부드러운 귄위와 여유가 묻어났다.

제23회 부산국제영화제는 올해 회고전의 주인공으로 1970~80년대 한국영화를 대표하는 이장호 감독을 선정했다. 70년대에는 데뷔작 ‘별들의 고향’(1974)을 비롯해 다수의 영화에서 흥행감독으로 명성을 쌓았고, 80년대에는 ‘바람불어 좋은날’(1980) ‘과부춤’(1983) ‘바보선언’(1983) 등 사회고발적인 작품으로 한국영화사에 한 획을 그었다. 영화제는 회고전을 통해 그의 주옥 같은 작품 8편을 선보인다.

이장호 감독이 활동하던 시기는 사전 심의 제도로 인해서 창작자들에게는 문화예술인 블랙리스트가 존재했던 지난 정권보다 더 엄혹했다. 이 시기에 일군 작품적 성취는 그를 ‘1980년대 한국영화 리얼리즘의 선구자’로 우뚝 서게 했다.

그런 이장호 감독도 의지가 꺾인 순간이 있었다. 한국영화를 분기마다 한 편씩 만들어야 외화를 수입할 수 있는 ‘외화수입쿼터제’가 있었던 때였다. 당시 많은 제작자들은 외화로 돈을 벌기 위해 되도록 적은 돈으로 되도록 빨리 (한국)영화를 만드는 것에만 혈안이 돼 있었다. 이 감독은 “내 시나리오가 자꾸 사전 검열에 걸려서 제작에 들어가지 못했다”며 “제작자는 독촉하고 정부는 막으니까 정나미가 뚝 떨어지더라”고 당시를 떠올렸다. 그는 “계약을 했으니까 영화를 안 만들 수 없어서 작품을 망치면 자연히 (영화계에서) 도태될 것 같았다”며 “내 원칙이 ‘영화는 리얼리즘이다’인데, 영화를 관두기 위해서 ‘바보선언’은 반리얼리즘으로 삐뚤게 만들었다. 그런데 검열도 안 걸리고, 해외 홍보용 우수 영화로 뽑혔다. 검열하는 사람이 내 의도를 파악하지 못 했던 것 같다”고 웃었다.

이장호 감독이 활동하던 시절에는 정부가 검열을 했지만, 지금은 자본이 검열 아닌 검열을 하는 시대다. 이 감독은 “그때보다 지금이 더 어렵고 더 불편한 시절”이라며 “돈의 논리에 의해서 움직이는 지금의 풍토는, 한국영화계에 상당히 어려운 시기를 가져올 것이다”고 걱정했다. 그는 프랑스의 누벨바그, 이탈리아의 네오리얼리즘, 미국의 뉴아메리칸시네마를 언급하며 “한국영화의 미래는 독립영화에 달렸다”고 언급했다. 그러면서 젊은 후배 감독들에게 작가정신을 가지라고 조언했다. 이 감독은 “우리 후배들이 ‘영상벌레’가 돼가고 있는 것 같다”고 안타까워하면서 “문학, 미술 영화 외적인 예술들에 대해서 관심을 가지고 사랑하기를 바란다”고 당부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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