이박사 "日동경대서 '뽕짝' 강의도…임영웅보다 인기 많았지" [인터뷰②]

  • 등록 2020-08-26 오후 12:50:23

    수정 2020-08-26 오후 12:50:23

[이데일리 스타in 김현식 기자] “다시 ‘신빠람’을 일으키고 싶다” 신곡 ‘술이 웬수다’로 야심차게 컴백한 가수 이박사의 말이다. 최근 이데일리와 만나 인터뷰한 이박사는 “오랜만에 신세대를 겨냥한 신곡으로 활동에 나서게 됐다”면서 활짝 웃었다. 관광버스 가이드 출신인 이박사는 1989년 메들리 음악을 앞세워 가요계에 정식으로 발을 들였다. 이후 1995년 일본 음악 시장에 진출해 이른바 ‘테크노 뽕짝’으로 열도를 뒤흔들었고, 국내로 돌아와 ‘몽키매직’, ‘영맨’ 등의 곡을 히트시키며 2000년대 초반까지 큰 사랑을 받았다.

하지만 이박사는 한창 전성기를 누리던 중 다리 부상을 입은 이후 오랜 시간 활동을 쉬었고, 2012년 다시 컴백했으나 이전만큼의 뜨거운 반응은 불러일으키지 못했다. 최근 빅대디엔터테인먼트와 전속계약을 체결하고 새 출발에 나선 이박사는 신곡 ‘술이 웬수다’ 발표를 계기로 다시 힘찬 날갯짓을 시작하겠다는 각오다. 인터뷰 내내 ‘테크노 뽕짝’에 대한 남다른 자부심을 드러낸 그는 “긍정적 기운을 담은 노래로 코로나19로 힘든 시간을 보내고 있는 국민들에게 ‘신빠람’을 불어넣고 싶다”고 힘주어 말했다.

일문일답은 [인터뷰①]에서 이어집니다.

-자타공인 ‘테크노 뽕짝’의 창시자다.

△처음에는 록을 했고, 그 다음 경기민요를 배웠다. 그리고 정통 트롯, 세미 트롯을 거쳐 메들리 음악을 하면서 메들리의 황제로 불렸고, 일본에 갔다 오고 나서 ‘테크노뽕짝’의 대백과사전이 됐다. 하하.

-이박사 ‘테크노 뽕짝’의 특징은.

△일단 테크노는 처음부터 끝까지 쉬지 않고 논스톱으로 간다. 이박사의 ‘테크노 뽕짝’은 간단히 말해서 테크노 음악 베이스에 그 누구도 흉내낼 수 없는 나만의 뽕짝이 더해진 장르라고 할 수 있다. 한번 리듬을 타기 시작하면 논스톱으로 주르륵 노래를 하는데, 이런 건 정말 아무나 못하는 거다. 내가 한 걸 내가 들어봐도 기가 막힌다. (웃음). 가히 천재적 재능이라고 할 수 있다.

-톤, 창법, 추임새 등도 독보적이다.

△일단 타고난 게 50이다. 나머지 30은 연습을 통해 만들어 낸 거고 20은 경험담이 녹아든 거다. 데뷔 전 12년 동안 관광버스 가이드로 일하면서 전국 팔도 사람들을 다 만났다. 하버드, 서울대, 동경대 출신 사람들부터 깡패까지 정말 다양한 사람들과 버스에서 시간을 보내면서 자연스럽게 많은 걸 보고 듣고 느끼게 됐고, 남들은 전혀 할 수 없는 나만의 것이 만들어졌다.

-천재적 재능을 인정받아 일본에서도 활약했다.

△일본 음반 매장에서 이박사만을 위한 CD 판매대를 따로 만들었을 정도로 인기가 대단했다. 당시 현지에서 최고로 유명했던 DJ들이었던 덴키 그루브 친구들과 같이 음반도 냈었다. 후지TV ‘헤이! 헤이! 헤이!’에서 라이브도 하고, 살충제 CF도 찍고 그랬다. 뮤직비디오도 밀착 취재하면서 찍었는데 그 영상도 무지하게 많이 팔렸던 걸로 기억한다.

-인기가 대체 어느 정도였던 건가.

△지금으로 따지면 아마 임영웅, 송가인 보다도 인기가 많았을 거다. 동경대에서 한국 뽕짝에 대한 강의까지 했을 정도니까. 정식으로 초대를 받아서 강의를 했고, 1시간 동안 공연도 했었다. 당시 나와 대화하기 위해 책을 사서 한국어를 배우던 신세대 팬들도 많았었다. 노랑 머리, 빨강 머리를 한 2,30대 신세대 팬들이 내 사인을 받기 위해 긴 줄을 서고, 절을 10번이나 하면서 사진 찍어달라고 하고 그랬었다. 그런 모습이 참 신기했던 기억이 난다. 여러모로 일본에서 국위선양을 한 가수인 셈인데 나라에선 공로패를 안 주네. (웃음).

-일본 활동에 대한 좋은 기억이 많은 것 같다.

△일본에선 그 시절에도 가수한테 주는 돈이 정확했다. 정산을 말 그대로 칼같이 하더라. 안 맞았던 건 음식이 내 입엔 조금 달았다는 것 정도 뿐이다. 그 외에는 100% 만족이었다. 일본 팬클럽 회장과는 지금도 가깝게 지낸다. 거의 매년 한국으로 놀러왔는데 올해는 코로나19 영향으로 아직 만나지 못했다.

-향후에도 일본에서 활동할 계획이 있나.

△작년에 일본 레코드사 3곳에서 러브콜을 보냈었다. 한 곳에서는 저를 만나러 인천까지 찾아와 3년 계약을 하자는 제안을 했다. 하지만 얽매이지 않고 자유롭게 살면서 음악 활동을 하고 싶어서 싫다고 했다. 일본에서 활동할 당시 체중이 41kg까지 빠졌을 정도로 쉬는 시간 없이 정말 바쁘게 지냈다. 최소 10명의 스태프가 같이 동행하기도 했었고. 지금은 그렇게 활동하기가 벅차다. 그래도 기분은 좋더라. 아직도 날 알아준다는 것이.

-한국 가요계에선 재대로 된 대우를 받지 못했다면서 아쉬워 하는 팬들이 많더라.

△원래 새로운 걸 해서 잘 되면 그 꼴을 못 보고 뒤흔드는 사람들이 있는 법이다. 하지만 신경 쓰지 않는다. 난 창의적으로 나만의 음악을 할 뿐이다. 누가 부탁하면 정통 트롯도 마음만 먹으면 언제든지 만들 수 있고.

-한창 전성기를 누리다가 다리 부상을 입은 뒤 슬럼프를 겪은 것으로 안다.

△2001년 6월 중순쯤으로 기억한다. 집 앞에 있는 나무를 자르다가 사다리에서 떨어져서 왼쪽 다리가 으스러졌다. 그 이후 한 9년간 활동을 제대로 못 했다. 요즘도 비 오는 날이면 다리가 쑤시고 아프다. 걸을 때 균형이 안 맞는 것 같은 느낌이 들어서 항상 가방을 들고 다니기도 한다.

-긴 공백기 등으로 인해 경제적 어려움도 겪었던 것으로 아는데.

△망했었지 뭐. 하하. 잡혀있던 공연 일정을 모두 취소하고 활동을 쉬면서 3층짜리 70평 집이 날아갔고, 그 뒤에 전세로 있던 사무실, 5천만 원 짜리 통장 10개 등이 모두 날아갔다. 나중에 다시 활동하면 만회할 수 있겠지 하는 생각으로 지냈는데 복귀하고 나니 그렇지가 않더라. 세월이 많이 흘렀다는 걸 느꼈다.

-야심차게 컴백했다. 새로운 잡고 있는 목표가 있나.

△흘러가는 대로 가려고 한다. 뭐든지 뜰려고 하면 잘 안 된다. 흘러가는 대로 하다보면 다시 ‘신빠람’이 불지 않을까 생각한다. 관광버스 가이드를 한 경험이 있어서인지 말을 재미있게 한다는 소리를 자주 듣는 편인데 ‘신빠람’이 불어서 예능 출연도 할 수 있게 되었으면 한다. 재미있는 형태의 CF도 들어오면 좋겠다. 올해 67세인데 남아있는 열정의 불꽃을 활활 태우고 싶다.

-마지막으로 하고 싶은 말이 있다면.

△세 가지다. 첫째, 코로나19가 없어지길 바란다. 둘째 CF가 들어왔으면 한다. 셋째 열심히 살겠다. 이상이다. (미소).

이데일리
추천 뉴스by Taboola

당신을 위한
맞춤 뉴스by Dable

소셜 댓글

많이 본 뉴스

바이오 투자 길라잡이 팜이데일리

왼쪽 오른쪽

스무살의 설레임 스냅타임

왼쪽 오른쪽

재미에 지식을 더하다 영상+

왼쪽 오른쪽

두근두근 핫포토

  • 이부진, 장미란과 '호호'
  • 그림 같은 티샷
  • 홈런 신기록
  • 꼼짝 마
왼쪽 오른쪽

04517 서울시 중구 통일로 92 케이지타워 18F, 19F 이데일리

대표전화 02-3772-0114 I 이메일 webmaster@edaily.co.krI 사업자번호 107-81-75795

등록번호 서울 아 00090 I 등록일자 2005.10.25 I 회장 곽재선 I 발행·편집인 이익원

ⓒ 이데일리. All rights reserved