시장 한복판에서 길바닥 프로레슬링이 열렸다고?

  • 등록 2016-07-31 오후 12:29:09

    수정 2016-07-31 오후 12:32:25

대구 서문야시장에서 열린 프로레슬링 경기에 앞서 포즈를 취하는 한국 프로레슬러들. 왼쪽부터 김남석(링네임 하비몬즈) PWF 대표, 복면레슬러 배드릴 섭지, 신예 레슬러 김수빈, 악당 레슬러 김남훈. 사진=이석무 기자
[대구=이데일리 스타in 이석무 기자] “어머! 짜구 하는 줄 알았는데 진짜로 때리네”

프로레슬링 경기를 흥미진진하게 지켜보던 한 20대 여성이 깜짝 놀란 채 이렇게 말했다.

그 말은 틀리지 않다. 프로레슬링은 사전 각본이 있는 거지 기술이 가짜는 아니다. 치명상만 입히지 않을 뿐이지 실제로 때리고 팔을 꺾고 몸을 집어던진다. 아스팔트 바닥에 머리를 부딪치고 쓰레기통에도 처박힌다.

저녁 시간에도 30도를 훌쩍 넘는 찜통더위가 이어진 30일 대구에서 프로레슬링 경기가 열렸다. 프로레슬링도 생소한데 경기가 열린 곳이 더 이상하다. 사각의 링이 설치된 체육관이 아니라 각종 먹거리 좌판이 깔려있는 시장 한복판이다. 아스팔트 바닥에 매트 한 장 달랑 깔렸을 뿐이었다.

대구 서문시장 야시장에서 열린 일종의 이벤트였다. 한국 프로레슬링 단체 PWF의 대표이자 간판선수인 하비몬즈(김남석)와 방송인으로도 활발히 활동 중인 악당 레슬러 김남훈이 한 팀을 이뤄 복면 레슬러 배드릴 섭지, 신인 김수빈과 태그팀 매치를 벌였다. 이른바 길 한복판에서 싸우는 스트리트 파이팅 매치가 펼쳐졌다.

겉으로 보기엔 초라하기 짝이 없었다. 하지만 열정만큼은 WWE 레슬매니아 그 이상이었다. 이들의 몸을 아끼지 않는 퍼포먼스는 지나가던 시민들은 발을 멈추게 하기에 충분했다. 처음에는 ‘저게 뭐야’ 호기심으로 바라보던 시민들은 이내 함께 박수와 환호성을 쏟아냈다.

화려한 언변을 자랑하는 악당 레슬러 김남훈은 대구를 디스(?)하는 발언으로 야유를 자초했다. 물론 의도된 행동이다. 관중들의 반응이 약하자 ‘좀 도와주세요’라고 귀엽게 본색을 드러내기도 했다. 경기가 끝난 뒤에는 아이들이 레슬러들과 기념사진을 찍기 위해 줄을 서는 모습도 연출됐다.

예상치 못한 곳에서 벌어진 프로레슬링 시합이었다. 하지만 시민들은 잠시나마 그 매력에 흠뻑 빠진듯한 모습이었다. 나이가 지긋한 한 할아버지는 “예전에 참 많이 보고 좋아했는데 여전히 이걸 하네”라면서도 “참 재밌게 잘한다”라고 흐뭇해 했다.

프로레슬링은 1960~70년대 국민적인 사랑을 받았던 스포츠다. 한국 전쟁의 폐허에서 먹고 사는 것 조차 힘겨웠던 국민들에게 스포츠라는 즐거움을 처음으로 선물한 것이 바로 프로레슬링이었다.

프로레슬링은 사각의 링에서 땅에 떨어진 민족적 자긍심을 되살렸다. 암울한 삶을 이어갔던 국민들은 김일의 박치기와 천규덕의 당수치기에 열광하며 시름을 잊곤 했다. 프로레슬링 경기가 열리던 날이면 장충체육관 관중석이 입석까지 가득찰 정도였다.

하지만 이후 야구, 축구, 농구 등 프로스포츠들이 인기를 얻으면서 프로레슬링은 뒤안길로 접어들었다. 지금은 프로레슬링을 순수하게 사랑하는 10여명의 선수만이 남아 소규모 대회를 열며 명맥을 잇고 있다. 물론 프로레슬링으로 돈을 번다는 것은 상상도 못할 일이다.

한국 프로레슬링을 지키는 젊은 레슬러들에게 뭔가 돌파구가 필요했다. 그래서 선택한 것이 ‘찾아가는 서비스’다. 가장 사람이 많이 모이는 곳에서 경기를 펼쳤다. 얼마전 신촌에서 깜짝 경기를 펼친데 이어 이날은 대구 최대 규모 재래시장인 서문시장에서 경기를 벌였다.

이날 경기에 출전한 김남석 PWF 대표는 “아직도 프로레슬링은 진짜가 아니다라고 무시하시는 분들이 있다. 이번 기회를 통해 프로레슬링은 정말 재미있는 엔터테인먼트라는 것을 알리고 싶었다”고 소감을 밝혔다.

이어 “첫 경기다 보니 100% 마음에 드는 경기가 나온 건 아니다. 아직은 부족한게 많다. 하지만 앞으로 계속 이벤트를 치르다 보면 더 재미있고 짜임새 있는 경기가 나올 것으로 기대한다”라며 “앞으로도 팬들에게 더 다가가서 한국 프로레슬링이 아직 죽지 않았다는 것을 보여주겠다”고 강조했다.

프로레슬링 이벤트를 기획한 전충훈 서문야시장 상설공연 총괄감독은 “일본 같은 경우는 시장 등에서 프로레슬링을 많이 한다고 하더라. 그런 얘기를 듣고 우리도 프로레슬링 시장 리그를 만들어보자는 생각이 들었다”며 “앞으로도 정기적으로 경기를 펼쳐 스토리를 만들어낸 뒤 10월에 해외선수들까지 불러 큰 규모의 대회를 열 계획이다”고 밝혔다.

뜨거운 대구 여름 더위. 하지만 프로레슬러들의 땀과 열정은 더 뜨거웠다. 시장 한복판에서 한국 프로레슬링은 여전히 살아있었다.

복면레슬러 배드릴 섭지가 악당 레슬러 김남훈의 머리 위로 쓰레기통을 내리꽂고 있다. 사진=이석무 기자
프로레슬러 김남석(하비몬즈)이 상대 선수인 김수빈을 상대로 파일드라이버(상대를 잡아서 거꾸로 들어 올린 뒤 그대로 떨어져 상대 목과 머리에 충격을 주는 기술)를 구사하고 있다, 미국 WWE에서 금지된 기술로 절대 따라해선 안된다. 사진=이석무 기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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