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700경기 전설' 김병지, 그를 전설이자 역사로 만든 원동력

  • 등록 2015-07-27 오후 4:34:23

    수정 2015-07-27 오후 10:15:04

통산 700경기 출전 대기록을 세운 전남 김병지가 팀동료들로부터 축하의 헹가레를 받고 있다. 사진=프로축구연맹
[이데일리 스타in 이석무 기자] 김병지(45·전남드래곤스)가 가는 길은 곧 K리그의 역사다. 꽁지머리에 튀는 유니폼을 입고 골키퍼임에도 골문을 비우고 득점을 노렸던 젊은 선수는 이제 40대 중반을 훌쩍 넘긴 중년이 됐다.

김병지는 1970년생, 우리 나이로 46살이다. 소속팀 전남의 노상래 감독과 동갑이다. 지난 1992년 울산현대에서 데뷔해 올해 프로 24년 차다. 5개의 소속팀을 경험했고 태극마크도 61번이나 달았다. 현재 대표팀의 주축인 손흥민(23·레버쿠젠), 김진수(23·호펜하임)은 김병지가 프로에 데뷔한 1992년에 태어난 선수들이다.

무모할 정도로 패기 넘쳤던 김병지는 더는 볼 수 없다. 하지만 여전히 현역으로 그라운드를 활발히 누비고 있다. 그를 ‘병지 삼촌’이라고 부르는 후배들과의 경쟁에서도 물러서지 않고 존재감을 발휘하는 중이다.

김병지는 지난 27일 전남 광양축구전용구장에서 열린 제주유나이티드와의 현대오일뱅크 K리그 클래식 2015 23라운드에 선발 출전해 90분간 활약하며 팀의 3-1 승리를 이끌었다. 이날 경기는 자신의 K리그 통산 700번째 경기였다.

김병지 이전에 누구도 그 같은 기록을 세운 적이 없다. 김병지 이후에도 이 기록이 쉽게 깨지긴 어려워 보인다. 벌써 한국 프로축구 역사의 길이 남을 불멸의 기록이 될 것이라는 전망이 우세하다.

도대체 무엇이 김병지를 오늘날 전설로 만들었을까. 그의 선수인생을 돌아보며 해답을 찾아본다.

▲철저한 자기 관리만이 살 길

프로의 세계는 냉정하다. 아무리 이름값이 높고 큰 명성을 쌓았더라도 당장 실력이 떨어지면 밀려날 수밖에 없다. 더구나 나이 많은 선수는 더욱 그렇다.

김병지가 현재까지도 주전 골키퍼로 활약하고 있는 데는 다른 이유가 없다. 오로지 실력이 뒷받침되기 때문이다. 김병지는 올 시즌 21경기에 출전해 22골을 허용했다. 경기당 실점률은 1.05로 나쁘지 않은 기록이다. 김병지가 골문을 든든히 지켜주는 덕분에 전남은 K리그 클래식 3위에 올라 있다.

나이를 먹으면 가장 떨어지는 부분이 순발력과 반응속도다. 총알처럼 날아오른 슈팅을 온몸으로 막아야 하는 골키퍼에게는 사형선고나 다름없다.

김병지도 분명히 체력이나 운동능력이 전성기 같지 않다. 중력의 힘에 따라 빠르기가 달라진다는 아인슈타인의 상대성이론처럼 김병지는 철저한 자기 관리로 노쇠의 빠르기를 늦췄다.

김병지는 프로 데뷔 시절 몸무게인 78.5kg를 지금까지 꾸준히 유지하고 있다. 나이를 먹으면 자연스럽게 체중이 불게 마련. 그래서 더욱 혹독하게 체중과 전쟁을 벌였다. 지난 23년 간 그 흔한 술과 담배도 입에 대보지 않았다. 경기 당일을 제외하고는 저녁 8시 이후 사적인 약속을 잡아본 적도 없다.

불혹을 넘기고도 아들뻘 되는 선수들과 나란히 뛸 수 있는 것은 이처럼 자기 자신과의 싸움에서 지지 않았기 때문이다. 김병지의 700경기 출전은 거저 얻어낸 것이 결코 아니다.

▲시련은 있었어도 좌절은 없었다

화려해 보이는 김병지의 축구선수 인생은 결코 순탄하지 않았다. 축구를 시작한 것부터 드라마틱하다. 어린 시절 축구를 너무나 하고 싶어서 고아가 아닌데도 부산 소년의 집(현 알로이시오고)에 들어갔다.

팀이 워낙 약했던 탓에 프로에서 그를 불러주는 곳은 없다. 그래도 포기하지 않았다. 학창시절 따놓은 자격증 덕에 엘라베이터를 만드는 금성산전(현 LS산전)에 취직했다. 낮에는 와이어로프나 도르래 등 부품을 관리하는 일을 했다. 시간이 나면 축구동호회에서 공을 찼다. 저녁에는 뼈를 깎는 개인운동을 했다. 축구에 대한 갈증을 풀면서 프로에 가겠다는 목표를 이어갔다.

좀처럼 기회가 찾아오지 않자 마지막이라는 심정으로 상무에 지원했다. 직업 선수도 아닌 일반 직장인이 상무에 입단한다는 것 자체가 거의 불가능한 일이었다. 하지만 남다른 순발력과 점프력을 인정받고 상무에서 선수생활을 할 수 있었다.

상무는 인생의 터닝포인트였다. 상무에서 그의 활약을 지켜본 울산 현대가 러브콜을 보냈고 치열한 주전 경쟁 끝에 입단 첫 해 주전 골키퍼 자리를 꿰찼다. 그렇게 시작한 프로선수 인생이 23년을 넘겼고 700경기 출전이라는 대기록까지 이어졌다.

2002년 한일월드컵은 그에게 가장 큰 위기였다. 그전까지 대표팀 부동의 주전 골키퍼였던 김병지는 월드컵을 앞두고 치른 파라과이와의 평가전에서 하프라인까지 직접 공을 몰고 나가다 그만 상대팀에 공을 빼앗겨 실점 위기를 맞았다.

그 장면을 보고 화가 머리끝까지 오른 거스 히딩크 감독은 곧바로 김병지를 교체했다. 그 일 이후 히딩크 감독의 눈 밖에 난 김병지는 골키퍼 경쟁에서 밀렸고 이후 대표팀 주전 골키퍼는 이운재에게 돌아갔다.

많은 이들은 이제 ‘김병지는 끝났다’, ‘이운재 시대가 왔다’고 말했다. 하지만 김병지는 뒤로 밀릴지언정 주저앉지 않았다. 더 오래 살아남은 쪽은 김병지다. 3살 후배 이운재가 이미 3년 전 현역에서 은퇴한 반면 김병지는 여전히 현역으로 활동 중이다.

김병지는 700경기 출전을 달성한 뒤 “이제 와 뒤돌아보니 달려온 길이 똑바르지 않고 삐뚤빼뚤했다. 앞만 보고 달려도 어려움과 고비가 많았다. 남은 인생도 마찬가지다. 앞으로도 한결같이 살겠다”고 축구인생을 되돌아봤다..

▲그는 인생 자체가 축구다

김병지는 뼛속까지 축구선수다. 오로지 축구만 생각하고 축구를 위해 산다. 심지어 세 아들 모두 축구선수로 자라고 있다. ‘태백산맥’의 정기를 이어받으라는 의미로 첫째는 태백(16), 둘째는 산(13), 막내는 태산(8)이라고 이름을 지었다.

첫째 태백이는 언남고 1학년에 재학 중이다. 언남고는 김병지와 울산 현대 시절 함께 뛰었던 정종선(49) 감독이 이끄는 팀이다. 훈련 강도가 세고 규율이 엄한 팀으로 유명하다. 학창시절 위계질서를 제대로 배워야 선수로 성공할 수 있다는 김병지의 생각 때문이었다.

김병지의 마지막 목표는 아들과 함께 K리그 그라운드를 누비는 것이다. 쉽지는 않다. 태백이가 프로에 오려면 아직도 2년은 더 기다려야 한다. 그때까지 김병지가 선수 생활을 할 수 있을지는 장담하기 어렵다.

자신과 같은 축구선수의 꿈을 키우는 세 아들과 함께 프로 무대를 누비고 싶다는 것이 그의 꿈이지만 현실적으로 고교 1학년인 큰아들 김태산과 함께라도 뛰고 싶다는 것이 김병지의 마지막 목표다.

김병지는 ”쉽지 않겠지만 777경기 출전은 자신있다“고 말했다. 그때까지 계속 몸 관리를 하면서 아들을 기다리겠다고 했다. 이미 불가능을 가능으로 만든 김병지이기에 이 같은 목표도 충분히 가능할 것 같다는 생각을 들게 한다

수많은 ‘최초’ 타이틀을 만들어낸 김병지가 ‘최초의 부자(父子) K리거라는 새로운 역사 창조를 준비하고 있다. 여전히 그의 도전은 현재 진행형이다.

이데일리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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